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새로 오신 국어 선생님은 대학을 갓 졸업한 미남 청년이었는데 우리를 아주 미워하셨다. 선생님의 ‘현대문’ 시간은 한마디로 싸움 시간이었다. “너희들은 무식하고도 건방지다. 그 못된 병을 고치는 치료법은 책을 많이 읽히는 수밖에 없다”라고까지 하셨다. 그때부터 우리는 이 선생님의 독서 프로그램에 따라 매주 두 권 이상씩 강제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야 했다. 리얼리즘부터 시작해서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에 이르기까지 잘 짜인 그 프로그램에 따라가지 못하면 정말 야단을 많이 맞았다.

그래서였을까, 세상 넓은 줄 모르고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떠꺼머리 ‘고딩’들이 카프카를 읽고 카라마조프를 입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말수가 적어지고 눈초리는 맑아지고 머리를 조금씩 숙이게 되었다. 나 역시 삶과 세상을 보는 자세가 달라져가는 것 같았다. 그 젊은 선생님의 독설과 등쌀에 나는 고등학교 첫 두 해 동안 아마도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책을 읽었을 것이다.

그때 베르나르 베르코르의 레지스탕스 소설 <바다의 침묵>(Le Silence de la Mer)을 읽게 된 것은 내 평생 가장 못 잊을 기억이다. 그때의 감동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특히 깔끔한 문장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그걸 대부분 졸졸 외울 정도가 되었고 번역을 한 ‘오징자(吳澄子)’1)라는 분의 이름까지도 연인의 이름처럼 기억하게 되었다. 책의 말미에 실린 역자 소개에 ‘이화여고 졸업, 서울대 대학원 재학’이라는 짧은 글과 엄지손톱만큼 작은 흐릿한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그때 내 나이는 ‘이화여고’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거릴 시기였다.

이후 나는 오 선생이 번역한 책은 일일이 찾아서 무조건 사서 읽었다. ‘징(澄)’이라는 글자를 옥편에서 찾아 뜻풀이를 되뇌기도 하고, 그 후로는 ‘명징성(明澄性)’이라는 단어가 좋아져서 내가 번역한 <건축가 없는 건축(Architecture without architect)>의 번역문에 잘 써먹기도 하였다.

2005년 6월 산울림 소극장에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을 보러 갔다가 오랫동안 혼자만 기억해 오던 오 선생을 50년 만에 처음 만났다. 도대체 그 오랜 기간 동안 서로 만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극적인 만남이었다. 그날 나는 너무 반가워서 남편 되시는 임영웅 선생이 옆에 계시건 말건 아랑곳없이 그 오랜 흠모의 정을 토로하였다. 임영웅 선생님과 산울림 소극장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오 선생이 그 임 선생의 부인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오 선생은 그렇게 바깥출입을 않고 오로지 뒤에서 남편의 내조만을 하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 오랜 시간 연극 연출로 평생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던지. 소극장을 운영하며 매번 좋은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나 같은 공돌이는 어렴풋이 짐작만으로 그런 상황들을 가늠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그 힘든 일의 뒤에 숨은 동반자로서 집안 살림을 해야 하고 현실 문제를 직접 챙겨야 하는 안주인의 고생은 아무도 이해하기 어려운 경지에 있었을 터였다. 임 선생은 힘들 때마다 “이 지랄은 더 이상 못 해 먹겠다”라는,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블라디미르의 세리프를 되뇌며 한숨을 지었다지만, 오 선생은 덩달아 힘들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남편을 격려해야 하는 입장이고 보니 내색도 못하고 속만 썩였다고 했다. 나는 그 오랜 이야기를 들으며 몹시 마음이 아팠다.

그 만남이 있은 후 나는 즉시 단골 관객에서 한 계급 격상되어 산울림 소극장의 한 식구처럼 공연의 뒤풀이에 초대받고 함께 술 마시고 기념사진을 찍게 되었다. 첫 만남으로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가끔 두 분을 뵈면서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6년 전부터는 임 선생의 건강이 나빠진 탓에 그 좋아하는 와인을 일체 못 마시게 오 선생이 엄명을 내리고 일일이 술잔에 간섭을 하셨다. 그런데 엊저녁에는 임 선생의 안색이 많이 좋아지고 따라서 오 선생도 술 잔소리를 안 하시고 나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임 선생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 술을 꽤 많이 드셨다.

이제 팔순을 넘긴 오증자 선생은 아직도 어린이처럼 부끄러움을 타며 소녀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종알종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신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임 선생님도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 놓고 술을 살살 드신다. 오 선생님이 가볍게 풀어놓는 이야기들은 듣기에 따라 우리 모두의 힘들었던 시대를 헤쳐 온 엄청난 역사의 기록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웃으면서 하고 또 웃어넘긴다. 오 선생에게는 50년 전 <바다의 침묵> 속에 가라앉았던 그 향기가 아직 그 소설 속의 프랑스 처녀처럼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