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마치 땅과 같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이 잦은 지진으로 인한 흔들림으로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다면 늘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곳에서 태어났다. 진도 7정도 지진의 우려가 항상 존재하는 곳이었다고나 할까.

어린 시절의 가족이란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전부였기에, 내게 그곳은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세계대전의 한복판과도 같았다. 나는 늘 불안정했고 아무것도 믿지 못했다. 재난 영화 속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엑스트라처럼 여겨지는 삶 속에서 나만의 공간에 꼭꼭 숨어 하루하루 살아남고자 애썼을 뿐이다. 이곳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은 외계의 또 다른 행성을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었지만 과거의 망령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친절한 척했지만 사실 사람을 싫어했고, 선한 척했지만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당해 보였지만 나 자신을 학대했고 과거에 얽매인 채 미래를 근심하면서 현재에 사는 법을 몰랐다.

그러던 중, 2013년 한 뮤지컬 작품에서 남편을 만났다. 그는 단단한 대지 위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자신의 선택에 늘 당당했고 의심이 없었다. 그가 내게 청혼했을 때 나는 그에게 ‘난 결혼하기에 좋은 여자가 아니야’ 라고 말해주었다. 남편을 내조하는 좋은 아내, 시부모님께 효도하는 좋은 며느리, 나 자신보다 아이를 위하는 좋은 엄마가 될 자질이 나에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당신은 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대신 자신은 아내가, 며느리가, 아이의 엄마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결혼을 위해서 결혼하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 것 같았던 나는 그렇게 그와 결혼했다. 마치 평생 한 번도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스카이다이빙을 하기 위해 헬기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하는 심정이었다. 나는 덜덜 떨면서도 그의 손을 꼭 붙들고 미친 척 뛰어내리는 것을 선택했다. 결혼식은 내 바람대로 홍대의 작은 라이브 클럽을 빌려 콘서트 형식으로 치러졌다. 그는 성시경의 <두 사람>을 부르며 입장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의 신부! 문혜원 양의 거친 입장이 있겠습니다!”는 말로 나를 소개했다. 나는 미니 웨딩드레스를 입고 흰색 망사스타킹에 부츠를 신은 채 일렉기타를 치며 브루노 마스(Bruno Mars)의 'Marry you'를 불러젖혔다. 주례부터 혼인서약까지 모든 것이 음악으로 이루어진 결혼식이 두 시간에 걸쳐 펼쳐지는 동안, 터져나갈 듯 클럽을 꽉 채워준 하객들은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웃고 환호하며 축복해 주었다. 그날, 아무것도 베푼 것 없이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나의 낡고 오래된 껍질이 부서져가는 것을 느꼈다.

시작은 그저 내가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지나가는 말로 툭 던져본 아이디어 조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냈다. 그 이듬해에도 우리는 <벌써 1년>이라는 타이틀로 자선 콘서트를 열고 그 수익금을 기부했다. 사람을 진심으로 아끼고 베풀 줄 아는 그가 아니었다면 절대 해낼 수 없었을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라며 한 발 뒤로 물러나 모든 칭찬을 나에게 양보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었다. 나는 이제 그 땅 위에서 두 발을 딛고 살아간다. 이곳에서 나는 모든 것을 새롭게 배워가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람들과 편안하고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사람, 좋은 배우자가 될 수 없는 사람, 좋은 음악, 좋은 연기를 하기에 한없이 부족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 스스로 한계를 그어놓았을 뿐, 사실 나에겐 어떠한 한계도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이곳에서 나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과 혼자일 때보다 더 큰 자유를 느낀다. 그를 만나고 뮤지션으로서, 배우로서, 딸, 아내, 며느리,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의 나를 더욱 더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믿는 그가 나를 믿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 집이란 그가 있는 곳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부족한 나를 봐주는 곳, 나를 심판하지 않는 곳, 벌거벗은 내 모습이 부끄럽지 않은 곳, 바로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