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의 음식들을 보면 우리가 보인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지금 어디쯤 서 있으며 또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 마치 한 그릇의 국수에서 삼라만상을 보았던 것처럼… (저서 <누들로드> 中).”

음식이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본 세상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와 같다. 그 아름다운 결에 새겨진 어제는 오늘을, 오늘은 내일을 빚어내는 동안, 시간의 매듭은 풀리고 흩어진 공간의 조각보는 하나의 거대한 벽화로 완성된다. 일상의 소소함에서 출발한 대항해는 맛깔스러운 이야기꾼, 바로 KBS 이욱정 PD의 ‘음식 문명사’로 기록된다. 그는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바디 상’을 수상한 화제의 다큐멘터리 <누들로드>(2008), <요리인류>(시즌제) 등을 통해 풍성한 이야기를 담백하고 정갈하게 담아왔다. 최근에는 <요리인류키친>의 진행자로 활약하면서 푸근한 인상과 말투로 전 세계에 걸친 요리모험담을 주방에 펼쳐놓았다. 한 그릇 한 그릇에 담긴 그만의 특별한 이야기, 그 속에는 어떤 레시피가 숨어있을까.

“진행은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연출자는 한 발 뒤에 서 있는데, 진행자는 전면에서 자신을 드러내잖아요. 프로그램의 간판이자 책임자의 위치가 되니 부담이 컸죠. 그래도 다큐멘터리에서는 다루지 못한 요리 과정을 현장에서 보여주면서 직접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어 좋았어요. 시청자들과 친근해진 기분이었죠(웃음). 10분 분량이라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데일리 프로그램의 장점도 있었죠. 앞으로도 다큐멘터리(요리인류)로 푼 다음 요리프로그램(요리인류키친)에서 직접 보여주는 포맷이 될 텐데, 세계 최초로 시도되는 모델이에요.”
요리, 음식, 셰프…, 최근 이 단어에서 파생된 콘텐츠와 의미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하나의 문화현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일명 ‘쿡방’‘먹방’과 더불어 요리 관련 서적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이는 음식문화가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콘텐츠로 성장했다는 방증이다. 음식이 단순히 굶주림을 채우는 ‘생존’의 영역을 넘어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 그리고 미적 태도로서의 ‘취향’의 기의(記意)가 된 것이다. 요리하는 남자가 새로운 매력으로 부각되면서 그동안 ‘요리’와 ‘남자’ 사이에 내재한 사회적 긴장감과 의미적 간극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남자가 패션에 눈을 뜬 것과 같아요. ‘무엇’을 먹고 ‘어떻게’ 만들 줄 안다는 것이 스스로 ‘어떤 사람’임을 표현하는 방식이 된 거죠. 원래 수컷/남자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암컷/여성의 관심을 끌어야 하잖아요. ‘남자다움’의 기준이 바뀌면서 요리가 문화의 일부, 하나의 놀이가 됐죠. 한편 인간은 자신과 남을 구별 짓는 습성이 있는데, 자신이 속한 나라, 계급, 집단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려고 하죠. 이를 의식하면서도 놀이의 단계가 됐다는 사실이 중요해요. 본질적인 의미도 모른 채 이미지만 소비하는 건 천박하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소박한 재료의 음식일지라도 가치를 제대로 알고 음미하는 게 진짜 멋이라는 것을요(웃음).”

 

‘놀이로서의 요리’, 이 말에는 사회로부터 주방으로 불어온 크고 작은 바람이, 다양한 사회문화적인 함의들이 녹아있다. 보이지 않는 주방의 작은 혁명은 의식(衣食)과 의식(意識)구조의

 지각변동으로 생성된 단단한 돌과 같다.

“요리 열풍은 생활 수준이 올라가고 도시화가 심해지면서 식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에요. 이런 흐름은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패턴으로 나타났는데, 유럽, 미국, 일본에서는 이미 10~20년 전부터 음식프로그램이 TV를 점령했어요. 소위 음식문화 선진국에서는 ‘맛있다’ ‘배부르다’를 넘어 요리의 가치와 의미에 일찍 눈을 뜬 거죠. 전문화된 요리에 관한 글, 평론, 기사, 책들만 봐도 알 수 있죠. 아직 한국은 이런 콘텐츠가 빈약하지만, 이제 시작이니 긍정적으로 봐요. 다만 비슷한 포맷에만 집중되지 않고 다양성과 깊이가 더해지겠죠. 요리에 담긴 인문학적인 지식, 스토리, 요리 자체에 대한 정보 등에 갈증을 느낄 테니까요.”

기존의 문법에서 벗어나 한 편의 영화와 같은 감각적인 영상미, 실험적인 스토리텔링으로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화법을 제시한 <누들로드>의 성공 이후 그가 선택한 것은 ‘요리유학’이었다. 세계적인 명문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런던캠퍼스)’에서의 2년은 음식에 투사된 다양한 서브텍스트들을 폭넓게 읽어낼 수 있는 시각 스펙트럼을 갖게 만들었다.
“방송국 PD나 작가는 직접 그 대상을 경험하는 대신 사유를 통해 말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잖아요. 그러다보면 자칫 함정에 빠지고, 자기 안에 전부 들어있다고 자만할 수 있어요. 그런데 창의력은 머리만이 아닌 손에서도 나오거든요. 가장 큰 배움은 손으로 만들고 몸으로 체험하는 데 있으니 전문적인 스토리텔러가 되려면 직접 해봐야겠다고 판단했죠. 유학을 안 갔다면 분명 한계가 왔을 거예요. 요리 안에는 양파를 까듯 많은 레이어가 있고, 평범해 보이던 요리도 엄청난 시간과 배움의 결과라는 걸 몰랐을 테니까요. 복잡하고 현란한 기교가 꼭 훌륭한 요리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도. 소박한 달항아리처럼 투박하지만 힘과 에너지가 있는,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죠.”

그는 다큐멘터리 속 세상을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에 비유했다. 큰 미션과 질문을 갖고 떠난 여행에서는 괴물을 만나기도, 또 현자를 만나기도 하면서 구도의 길을 걷기 때문이란다. 그 여정에서 스토리텔러, 프리젠터, 프로듀싱 디렉터로서의 PD는 자신이 본 세상을 독특하게 해석하고 고유의 언어색으로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요리로 치면 플레이팅, 즉 접시에 어떻게 담느냐의 문제죠. 창의적인 스토리텔링은 흩어져 있는 색색의 구슬들을 다른 방식으로 엮는 거예요. 독창적인 짝짓기, 매칭, 조합이죠. 그래서 사소한 생각 하나까지도 영감이 될 수 있어요. 사고의 유연성은 콘텐츠 창작자의 가장 큰 자질이고, 타인의 문화를 서열화하고 우열을 가리는 자문화중심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해요. 문화적 상대주의, 혹은 시점의 상대주의에서 창의성이 나오거든요. 어떤 기준, 틀, 스탠다드에 따라 타인을 규정짓고 재단하는 건 창의성의 가장 큰 적이죠. 저 역시 전작과의 차별화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어요. 준비 중인 <요리인류 어드벤처>에서는 음식 혹은 문화나 역사에 문외한이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이 시청 후에 그것의 역사적인 의미를 스스로 찾아볼 수 있게 일종의 동기나 영감을 주고 싶어요. 그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이죠(웃음).”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은 마들렌 한 조각으로 잃어버린 시간, 즉 과거로의 회로를 되찾는다. 이처럼 음식의 맛과 냄새는 인간의 오래된 감각을 열어주는 원초적 기억의 지도이며 이는 다양한 이미지로 저장된다. 과연 그는 음식에 대한 어떤 기억의 식감을 갖고 있을까. 이에 생애 첫 요리사인 ‘어머니’와 냉면 한 그릇의 추억으로 남아있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인간이 기억하는 맛의 심연에는 그리움이 담겨있고, 태고부터 요리는 함께하는 따뜻한 경험”이라는 말과 함께. 다시, 그의 앞에는 빈 접시가 놓여있다. 거기에는 실재하든 그렇지 않든 참정신, 참요리가 담길 것이다. 음식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이를 요리하고 싶은 그의 서사적 욕망이 살아있는 한.


글. 사진/ 김신영 기자
장소: KBS <요리인류키친>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