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에 대한 원고를 요청받고 생각하니 저는 아버님과 깊은 대화를 나눈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늘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시다가 통금 시간이 되어 귀가하셨고 아침에는 일찍 출근하는 분이었습니다. 저 또한 스무 살 무렵 미국 유학을 가 20년간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아버님을 이해하는 것은 주로 TV 영상이나 책을 통해서입니다. 아버님은 53권의 시집을 남기셨지만 그에 못지 않게 38권의 수필집을 남기셨습니다. 시집이 나올 때마다 저에게 한 권씩 보내주셨는데 아마도 말로 하지 못한 것을 책으로 전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님의 시 <나의 생애>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럭비는 나의 청춘, 시는 나의 철학, 그림은 나의 위안, 어머니는 나의 고향 나의 종교’ 저는 이 시가 아버님의 삶을 간략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럭비는 아버님이 경성사범학교 시절부터 해 오시던 운동이었습니다. 아버님은 럭비에 대한 애정이 깊어 럭비협회 이사로 활동하셨고, 가시는 학교마다 럭비부를 창설해 선수들을 지도하셨습니다. 럭비는 미식축구와는 달리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몸을 부딪치는 격렬한 경기라서, 선수들은 늘 상대방의 안전을 고려하여 경기에 임합니다. 럭비를 신사들의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인데, 럭비선수들은 이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젊은 시절 럭비에서 배운 스포츠맨십을 중요하게 생각하셨고, 그래서 ‘럭비는 나의 청춘’이라고 말씀하신 거라 생각합니다.

물리학자가 꿈이었던 아버님은 시인의 길로 들어선 후 여러 문인과 화가, 극작가들을 만나셨습니다. 명동에서 활동하던 그때를 ‘종합예술대학 시절’이라고 부르실 정도로 아버님은 이 시기 많은 예술인과 교류하며 자신만의 예술관을 키우셨습니다. 소위 독학을 하신 셈이지요. 이러한 과정을 밟으면서 일관되게 ‘인생’을 주제로 한 철학을 시로 쓰셨습니다. 혹자가 아버님의 시를 너무 쉽고 시대 참여의식이 부족하다고 평하여도 굴하지 않고, 본인의 철학을 독자들이 알기 쉽게 시로 옮기셨습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인생, 그것이 아버님의 일관된 주제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시는 나의 철학’이라고 말씀하신 게 아닐까 합니다.

아버님은 항상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셨습니다. 시 구절이 생각나시면 거기에 시를 쓰시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해외여행을 하시면서도 많은 그림을 스케치하여 화집으로 내신 적도 있습니다. 유화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신 것은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을 맡으신 후입니다. 어렸을 적 화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실현하신 것이지요. 취미 삼아 그린 것이 18회가 넘는 초대전을 여셨으니 웬만한 화가 못지않은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의 작품은 시로 표현 못 하신 것을 그린 것 같아 그림도 하나의 시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림은 나의 위안’이라고 하셨나 봅니다.

아버님은 늦둥이셨습니다. 바로 위 형이 아버님보다 9살이나 많았으니, 아버님은 엄한 할아버님이나 나이 차이 많은 형님들보다 할머님하고 가까우셨지요. 할머님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셨지만 늘 부지런하시고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습니다. 아버님이 밤늦게까지 공부하느라 깨어 있으면 안 주무시고 무슨 일이든 하셔야만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자는 척을 하고 있다가 할머님이 주무시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종교가 없으셨지만 불교 신자였던 할머님 곁에 가시기 위해 불교를 가까이하셨습니다. 아버님의 묘비에 적힌 시 <꿈의 귀향>은 단 세 줄로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아버님은 그 시처럼 원천적 고향인 할머님께 귀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