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적인 표현이지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말을 요 몇 년간 되뇌며 살았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컵아트’라는 작업의 공이 절대적으로 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 그 전에 컵아트라는 게 무엇인지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컵아트’라는 단어가 생소하다면 그건 매우 당연한 일이다. 내가 만든 단어이기 때문이다. 종이컵에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다양한 표현을 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을 나는 편의상 ‘컵아트’라고 불렀다. 누구나 아는 두 영어 단어를 합친 거라 누가 만들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지만, 적어도 처음 컵아트를 명명할 당시 국내에선 아무도 이 단어를 쓰지 않았다.
좀 더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림 그리며 살겠다고 발버둥 치던 시절이 있었다. 일거리가 없어서 온종일 작업실 구석에서 커피만 홀짝이던 나는 뭐든 그리고픈 마음에 주변 다양한 사물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사물 중 하나가 바로 모 유명 커피점의 테이크아웃용 종이컵이었다. 다 마신 종이컵을 버리지 않고 책상 위에 쌓아두는 지저분한(?) 버릇 덕분이었다.
단순히 미학적으로 예쁘고 멋있는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종이컵에 ‘나’의 욕망, 바람, 불만 등의 감정을 투영하고자 했다. 힘들었던 프리랜서(라고 쓰고 반백수라고 읽는다)의 삶, 더 힘들었던 회사원 시절 겪은 일, 사정없이 치이던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커피에 함유된 카페인으로도 어쩌지 못한 감정들은 그렇게 그림을 그림으로서 비로소 해소될 수 있었다.
작업물의 개수가 늘어나자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허접스러운 종이낙서라도 그 수가 많으면 거기에 의미가 피어나기 마련. ‘일단 100개만 그려봐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컵아트 100개를 채우는 데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다음부터는 앞서 말했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컵아트를 사진이 아니라 실물로 보고 싶다는 이들의 요청에 따라 크라우드펀딩으로 자금을 모아 개인전을 열었고, 강연 의뢰가 들어와 강단에 섰다. 해외 언론에 소개되어 SNS 외국인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홍콩에서 열리는 단체전에 초청받아 캐리어 가득 종이컵을 싣고 홍콩에 가기도 했다.
작업 방식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종이컵에 말 그대로 그림만 그렸으나, 새로운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칼로 구멍을 뚫기도 하고 종이컵을 캔버스에 붙이기도 했다. 여러 종이컵을 합쳐 한 가지 주제를 표현하기도 하고, 내부에 전구를 넣어 빛을 내기도 했다. 손으로 직접 그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작업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그 모든 행동이 머리와 가슴을 지나 손끝에서 이루어졌다. 처음 종이컵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4년 전에는 상상도 못 한 표현방식이었다.
누가 나의 직업을 물으면 ‘컵아티스트’ 혹은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대답한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상업적 의도로 의뢰한 그림을 그 의도에 맞춰 그려주는 직업이다. 이 일에 처음 뛰어들었던 4년 전에는 나를 포함한 누구도 종이컵에 그린 그림이 상업적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기능하게 될 줄 몰랐다. 컵아트는 그저 돈벌이용 그림 그리기에 지쳤을 때 틈틈이 개인 작업 혹은 취미생활로 하던 작업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이런 그림도 있습니다.”라고 꾸준히 어필한 결과, 사람들이 컵아트라는 작업물을 상업적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의뢰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 작업물은 잡지와 블로그에 연재되고 TV 프로그램에서 소품으로 쓰이기도 한다. 나의 작업방식이 미약하게나마 일러스트레이션의 한 카테고리가 된 셈이다.
글을 쓰다 보니 날이 밝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종이컵에 그림 그리는 일로 글까지 쓰다니. 역시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앞을 알 수 없기에, 오늘도 종이컵에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지금껏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일어날 것 만 같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쭉 그래 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