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아버지는 한글학자이자 애국지사이신 외솔 최현배 선생이다. 할아버지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말살하려 한 일제에 저항하면서 우리말 문법 체계를 정리 정돈하여 <우리말본>과 <한글갈>을 펴내셨고, 해방 후에는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재임하면서 국어교과서를 편찬했으며, 한글 전용을 관철하신 분이다. 특히 보수적인 국한문 혼용주의자들 앞에서 끝까지 한글을 전용해야 한다는 당신의 주장을 고집해 ‘최 고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 고집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는 데 평생을 바친 강직함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1942년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동료 학자들과 함께 투옥되었을 때도 할아버지의 강직함은 꺾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운영했던 한 식당의 방명록에 할아버지께서 남긴 친필이 최근 발견되었는데, “한글이 목숨. 최현배”라고 쓰신 글귀에는 어디서나 한글 사랑을 전하셨던 할아버지의 비장한 결의가 느껴진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뜻과 어긋나는 일 앞에서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셨지만, 손자 손녀에게는 너무나 자상한 어른이셨다. 내가 어렸을 때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난초 화분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다음과 같은 한 통의 친필 편지와 함께….

“은희야, 문식아, 은경아, 홍식아, 은미야. 난초 화분 하나를 보낸다. 꽃을 보는 마음은 꽃처럼 아름답다. 아름다운 꽃을 보려면, 날마다 날마다 잘 가꾸어야 한다. 1964. 6. 8. 할아버지.”

어렸을 때라 당시 보내 주신 난초 화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사진을 찍은 것도 아니어서 남기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보내주신 이 편지를 무척 좋아하셨고, 예쁜 액자에 넣어 잘 보관한 후 우리에게 가끔 보여주곤 하셨다. 나도 이 편지를 참으로 좋아한다. 울산 외솔기념관에 유물로 기증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편지글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손자 손녀가 생명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랐을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해진다.
요즘 같은 컴퓨터 시대, 모바일 시대에는 친필 편지보다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 사진 전송 등으로 가족과 친구, 동료 사이에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손으로 직접 써서 보낸 편지 한 장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녔는지, 또 받는 이의 마음에 길게 여운을 남기는지 할아버지의 친필 편지를 보며 새삼 깨닫는다.

할아버지의 친필을 담은 소중한 유품 중에는 한글 서예 족자도 있었다.
“마음을 오로지하여 한 가닥으로 쓰라. 하나를 마치고서 다음을 잡으라. 날마다 날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도 일생을 통하여 변챦는 하나의 일을 지으라.”
평생 한글 사랑과 나라 사랑을 실천하신 할아버지의 큰 업적을 생각하게 하는 귀한 말씀이다. 이 족자는 우리 집안에서 가훈으로 삼은 뜻깊은 말씀이 되었다.
‘날마다 날마다’라는 표현이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친필 편지와 족자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해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한 가지 더 있다. 매일 저녁 식사 후에 할아버지께서 상을 물리며 “빨간 펜을 찾아오너라” 하고 말씀하시면, 나는 “할아버지, 빨간 펜 여기 있어요” 하고 갖다 드렸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신문이 오지 않는 날을 제외하고 날마다 그날 배달된 신문 기사를 모두 점검하면서 틀린 글자나 잘못 표현된 부분에 붉은 글씨로 수정하여, 다음 날 아침 각 신문사 편집부로 보내셨다.
이렇게 한글 사랑에 평생을 바치신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는 외솔회 이사장과 한글학회 이사를 거쳐 2015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꽃을 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관심과 애정으로 가꾸는 손길이 필요하듯, 일생을 통하여 변치 않는 큰일을 이루려면 “날마다 날마다 노력하며 살라”고 일러주셨던 할아버지. 그 가르침을 한결같은 행동으로 보여주신 할아버지의 뜻을 날마다 가슴에 새기며, 한글 사랑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는 데 힘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