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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공연

구분  문화/예술/공연
정간물명   월간에세이
게재월   2016년 05월
제목  미국에서 만난 우리나라의 미덕 - 만남 / 이석영, 천문학자·연세대 교수


1991년 미국 유학을 갔을 때 큰 고민에 빠졌다. 그때까지 나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왔지만, 처음 본 미국은 모든 면에서 한국을 압도했다. 1년쯤 지났을까? 나는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한국의 미덕이 무엇인가를. 한동안 고민한 끝에 얻은 첫 번째 답은 ‘단일 민족’이었다. 미국은 풍요로운 나라였지만, 워낙 다양한 배경을 가진 민족들이 모여 사는 나라여서 복잡했다. 내가 미국에 도착한 그해 LA 폭동이 있었다. 경찰관 십 수 명이 한 명의 비무장 흑인, 로드니 킹을 무참히 폭행한 끝에 죽게 한 사건에 흥분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 일로 LA 한인 타운이 큰 피해를 당했다. 뉴스로 그 내용을 지켜보는 내 눈이 감을 줄 몰라 따가웠다. 그 영상은 내 기억에 큰 멍을 남겼다. 아, 인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구나.

그래서 내가 떠올린 한국의 장점이 단일 민족의 강점이었다. 그런데 살면서 보니, 미국의 다양한 민족 구성은 꼭 약점만은 아니었다. 문화의 다양성이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무수한 이점 중 단연 최고는, 그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문화의 다양한 기준을 이해하고 용납하면서 좋은 점을 배우는 지혜를 얻는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더욱 성숙한 문명이 되는 것이다. 미 대륙에 근대 사회를 먼저 건설한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미국을 찾은 아일랜드, 이탈리아, 중남미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줬고, 그 대신 다양한 사회를 구축해 성숙한 문명으로 발달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종과 문화가 빠르게 다양해지고 있다. 머지않아 이로 인한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생기겠지만, 지혜롭게 대처하면 결국 긍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설혹 그렇지 않더라도 그건 선진 사회가 감당해야 하는 인류적 책무 아닌가. 이렇게 이해하고 보니 우리 사회는 더는 단일 민족도 아니거니와, 단일 민족이라는 것 자체가 딱히 장점이라고 할 만한 것도 못 되었다.

그럼 한국의 유교 문화는 어떨까? 예를 들면 장유유서. 난 이게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이 기준에 의하면 미국은 다른 선진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상놈의 사회’이다. 말에도 위아래가 없고 행동에도 그렇다. ‘하하, 한국이 미국보다 나은 게 이거구만’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런 생각도 흐릿해졌다. 내 미국인 지도 교수는 늘 내 의견을 존중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더 많이 안다고 해서 강압적인 자세로 가르치는 일은 없었다. 그룹 회의에서는 최고의 의견이 존중될 뿐, 가장 지위가 높은 분의 의견이라 해서 가산점이 붙는 일은 없다. 이런 현상에 대한 가장 단순한 표현은? 합리적. 우리나라에서는 하극상.
나이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존중하기는 하지만, 항상 그들의 의견이 옳을 거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고 나니, 두 번째로 고른 한국의 미덕 또한 사라졌다.

그러면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는 어떨까. 미국에선 이게 통할 줄 알았다. 미국의 200년 역사를 어디 한국의 5000년 역사에 견줄까. 그런데 이건 보기 나름이다. 미국이 지난 200년간 오늘날의 미국을 만드는 동안 우리는 뭘 했던가. 한국의 미덕을 찾기에 급급한 나는 급기야 한글을 생각해내기에 이르렀다. 한글은 세종 때, 우리 민족의 필요에 따라 개발한 합리적인 문자 아닌가. 내가 본 그리 많지 않은 외국 문자들보다 생기기도 잘생겼고 과학적인 한글은 자랑이라 할 만했다. 언젠가 외국인들도 자주 찾는 거제도의 멋진 호텔에 머문 적이 있는데, 승강기 안에 한글이 하나도 없고 순 영어로만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서운함을 느꼈다. 아내에게 동네 이장님으로 불리는 나는 호텔 직원에게 정중하게 항의하고 말았다. “아니, 한글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문자인데, 일부러 더 많이 써 놓아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한 글자도 안 쓰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영국에서 온 내 동료 학자 중 하나는 단 1주일간의 방문이 끝날 무렵 길거리 광고판을 줄줄 읽어댔다. 물론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한글은 그만큼 배우기 쉬운 글자다. 그런데 읽는 것까지는 쉽지만 문법에 맞게 쓰는 것은 매우 어렵다. 대학 교수인 나조차도 그렇다면 그 문자를 쓰는 법칙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한글을 좋아하지만, 한글이 국제적 자랑거리인지는 더 이상 자신이 없다. 한때는 한국인의 민족성을 자랑거리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정이 많고 흥이 많은 것. 하지만 우리에겐 한도 많고, 다혈질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런 기준들은 너무 주관적이다.

나는 직업 특성상 1년 중 한두 달을 해외에서 보낸다. 지금까지 방문한 국가만 해도 수십 곳이 되고, 그들 국가에서 각기 좋은 점, 배울 점을 수없이 발견했다. 그래도 한국이 좋은 점이 있다면, 여기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우리나라’라는 점. 내게는 이 이유 하나가 다른 멋진 나라들의 미덕을 다 물리치고도 남는다.


약력 | 예일대 박사학위. 미 항공우주국(NASA) 고더드 우주비행센터 박사 후 연구원, 캘리포니아 공과대 선임연구원 및 옥스퍼드대 물리학과 교수 역임. 현재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2013년 미래창조과학부 지식창조대상 수상. 저서 <모든 사람을 위한 빅뱅 우주론 강의>, <초신성의 후예>.





           [출처] 월간에세이 (20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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