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_ 나와 그녀의 만남 _ 신소율

만남

나와 그녀의 만남

신소율, 배우

내 안의 그녀를 만난 건 현재가 더없이 황홀하다 느끼던 때였다. 오롯이 스스로만을 지탱하며 살리라는 다짐을 무색하게 만든, 저항 없이 스러져 기대고 싶은 지금의 반려자를 만나 한참 달금함에 퐁당거리던 시절. 서로의 부모님을 수차례 뵙고, 전보다 독지한 사이가 되어갈 무렵, 그가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있다. “자기는 정말 자기 어머님이랑 똑같구나.” 나는 그 말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내가 본 그녀의 터전은 좁디좁았고, 자아의 도량은 얕고 밭았다. 20대 초반, 급작스럽게 나를 만난 그녀에게 다양한 경험과 식견을 쌓을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녀의 우주였다.

내가 어릴 적, 동네 어귀 좁은 골목에서 승용차 바퀴에 발이 깔린 적이 있었다. 너무 놀라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생된 생각에도 부러 움직이면 더 큰 문제가 생길까 싶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태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멀리서 비척걸음으로 달음박질쳐서 오던 그녀의 얼굴, 그것은 붉은 회색이었다. 좀처럼 어우러지지 않는 두 가지 색은 그로테스크한 명화를 감상할 때 속 깊은 곳에서 불쑥 고개를 드는 미량의 불쾌함을 가진 그것이었다. 거칠고 불안정한 색채의 조합에 그제야 공포감이 몰려와 눈물이 터졌다. 방금까지도 곧 무너질 것 같이 휘청거리던 그녀의 다리는, 순식간에 괴력을 발휘해 나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향했고, 다행히 나는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훗날 전해 들었던 이야기에 따르면 같이 하원을 하던 옆집 친구가, 사고 직후 우리 집으로 뛰어가 내가 차에 깔렸다는 과장된 상황을 전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날 ‘하늘이 무너진다’를 처음 경험해 보았다고 했다. 뒤틀린 지면이 허공과 딱 붙어, 발이 땅에 딛는 감각이 무뎌 몇 번이고 넘어졌다고 한다. 그녀의 소우주가 은하계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단다. 이후 금세 멀쩡히 일어나 뛰어다니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며칠 동안이나 아팠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첫 받아쓰기에 100점을 받은 날, 재생 종이 위 빨간 동그라미 10개를 몇 번이고 세어가며 며칠간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그녀. 소풍 때마다 입고 갈 옷을 함께 고르던 표정, 자퇴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한순간 멈춰버린 눈동자, 대학 합격 소식을 받고 한없이 치솟던 입꼬리, 영화 시사회장에서 늘 상기되어 있는 발간 볼. 가만히 회상해 보면 그녀의 안색은 오로지 나로 인해 명도와 채도를 달리했던 것 같다. 자신의 일로, 본인의 감정으로, 당사자의 온도로는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다채롭고 풍성한 그녀의 감정과 표현이 좋았던 때도 있었지만, 그 모든 변화의 근원지가 오로지 나라는 사실을 인지하고부터는 (배부른 소리겠지만) 그 모습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 곳만 바라보는 여생을 시작한 그녀는 순진하다 싶으리만치 세상 물정에 어두웠고, 외부의 자극에 무뎠다. 내 손가락 하나에 웃고, 눈가와 코끝의 꿈틀거림에 아울러 울었다. 나는 그 희생적이고 일방통행적인 사랑이 언제부터인지 버거웠었나 보다. 그녀가 나를 벗어나 바깥세상을 더 많이 보길 바랐고, 대범하고 씩씩한 사람이 되어 자신을 위해 살기를 종용했다. 하나 그녀가 만들어 가는 삶의 모습은 한계를 치는 울타리였고, 나는 그곳에서 탈출하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독립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없는 면모를 담고 자라 서로를 지탱해 주는 사이가 되는 것만이 옳은 길이라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독히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절대 그녀와 닮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순간에 내 안에서 그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결단코 부인하려 했으나, 새로운 모습으로 계속 치솟아대는 흔적들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는 그녀였다. 어쩌면 마주하기가 두려웠을 내 안의 그녀를, 십수 년 만에 다시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 뿌리는 온전한 사랑이리라.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이 생기면 약해지고, 작아지고, 애달픈 것일 테다. 자신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도 툴툴 털고 일어나면서, 사랑하는 존재가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걱정하게 되는 것. 완벽한 순애였다.

나는 그녀의 맑은 눈을 닮았고, 짧고 동그란 얼굴형을 물려받았다. 손끝이 야무지고, 앉은 자리가 무거운 기질부터, 타인의 울음에 바로 열리는 눈물샘의 감성이 비슷하다. 사랑하는 이를 향하는 마음의 모양도 같다. 그녀의 장점만 쏙 빼닮은 축복을 얻은 것이다. 날 가두는 철장이라 생각했던 기반은 어느새 나의 기준이 되었다. 작은 그릇이라 느꼈던 그녀의 위옹은 사소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었고, 새들한 것에도 아파하던 전전긍긍은 다정함임을 깨달았다. 대가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 아름다운 순정은 거룩한 사랑임이 분명했다.

나는 끝내 기억해 내지 못할 우리의 첫인사가, 나로 인해 매 순간 특별하게 반짝였을 그녀의 얼굴이, 그리고 매번 다른 감정으로 만났을 우리의 순간이, 빛이 들어간 필름처럼 희미하다. 그녀가 행복이라 부르던, 다시 돌아가지 못할 아름답던 그녀의 시절이 안타깝고 아쉽다. 물리적 시간이 아닌 감정적 시간들은 세월에 따라 단축되고 속도가 빨라질지니, 이제라도 난 그녀를 필히 제대로 마주하려 한다. 이 애틋함을 영글고 여물게 느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바야흐로 나와 그녀의 만남은 나날이 새록새록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