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를 마친 각시가 시집으로 타고 가는 가마 위에 호랑이 가죽을 덮었다. 진짜 호랑이 가죽이 없으면 호랑이를 그린 덮개라도 덮었다. 그림으로나마 액을 막는 호랑이의 영험함을 빌리려는 뜻이었다. 혼례 때가 아니어도 여자들이 입는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 허리에는 호랑이 발톱 모양의 노리개를 달았다. 역시 같은 의미였다. 용맹한 호랑이의 힘으로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액운을 막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작가 미상의 19세기 조선 그림 ‘달빛 아래 솔숲 사이 호랑이들 (月下松林虎族圖)’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한국인에게 호랑이는 벽사의 동물이었다. 건물을 지을 때 주춧돌에 호랑이 그림을 새겨넣은 판석을 쓰기도 했고, 물·불·바람 때문에 오는 세가지 재앙인 삼재를 막는 부적에도 호랑이를 넣었다. 나무판에 새겨놓고 필요할 때마다 부적을 찍어낼 수 있게 만든 삼재부적판에는 큼지막한 호랑이와 그 꼬리에 앉아 있는 매의 모습을 넣었다. 말에 매다는 방울에도 호랑이 얼굴이 들어가 있다. 그냥 방울 소리로는 모자라 호랑이 문양 방울이 울려야 액운을 피할 수 있다고 기대했던 듯하다.

한국인에게 호랑이는 한가지 얼굴만 가진 동물이 아니었다. “호랑이는 야행성이잖아요. 특히 밤에 보면 활활 타는 듯한 안광이 사람들을 얼어붙게 했을 것이고 귀신이나 요괴조차 쫓는다고 봤겠죠.” 김종대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이웃나라 일본과 달리 한국에선 요괴에 관한 전설이 크게 적은 이유가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호환(虎患)’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나오는 데 대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말했다.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호랑이가 아예 자취를 감춘 현대 한국과 달리 호환 자체가 가장 위협적인 액운이었을 시절, 옛 선조들은 액으로 액을 막은 것일까.

다양한 얼굴 가진 동물

이와 같은 역설적인 믿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흔적이 바로 호식총이다. 강원도 태백산 일대 산간지역에 160여기가 남아 있는 이 무덤은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고 난 뒤 남긴 유구(遺軀)를 거둔 뒤 돌을 쌓아 덮어 만든 무덤이다. 기록으로 남은 호환은 호랑이뿐 아니라 표범 등 과거 ‘범’이라는 말로 통칭하던 맹수의 습격에 피해를 입은 사례를 모두 망라하는 경향이 있어 건수도 많았다. 앞선 신라시대에는 헌강왕 11년인 885년 호랑이가 궁궐 마당으로까지 뛰어들어 왔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고, 고려시대에도 수도인 개경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선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호환 기록만 635건이나 된다.

특히 조상들은 호환을 당한 사람의 혼백이 ‘창귀’라는 귀신이 된다고 생각했다. 창귀는 죽어서도 호랑이의 명에 따라 다른 사람을 유인해 바친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런 창귀를 제압하기 위한 풍습인 호식장도 있었다. 호환을 매개하는 창귀를 피하기 위해 호식총은 가까이 가서도 안 되고 벌초조차 하지 않는 금기의 영역이었다. 손쓸 틈 없이 닥친 호환이란 운명을 창귀라는 존재를 통해 설명하는 한편 피하려는 시도 역시 병행한 셈이다.

호환 피해만 보면 호랑이는 두렵고 꺼려지는 금기의 대상이었음 직하다. 하지만 ‘착호갑사’라 불리는 호랑이 사냥꾼이 조직적인 형태로 등장하는 조선시대에 이르면 보다 효율적인 제압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전부터 호랑이의 가죽뿐 아니라 각 부위는 <본초강목>에도 나오듯 약재로 이용했다. 대표적으로 호랑이 뼈는 병에 걸려 일어나는 발작 등을 멈추게 하고, 호랑이 눈은 정신이 산란한 환자에게 특효로 통했다. 치통에는 호랑이 수염을 쓰고, 쇠붙이를 삼키는 등의 사고에는 호랑이의 오줌을 쓰라는 처방도 있었다.

김종대 관장은 여기에 더해 또 다른 차원의 설명을 내놓았다. “각종 설화나 민담에서 호랑이는 강하고 용맹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리석거나 비겁한 모습으로도 나옵니다. 백성들이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이중적인 모습을 호랑이에 빗대 해학적으로 풍자한 거지요.” 벼슬아치들의 학정이 호랑이보다 무섭다며 공자가 말했다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예기> ‘단궁하’편)의 본뜻을 실생활 속에서 경험한 선조들이 그 교훈을 이야기 속에 숨겨둔 셈이다.

이렇듯 호랑이는 한쪽의 단면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세상살이의 여러 모습을 고루 드러내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다. 꾀 많은 토끼에게 속는다거나, 느닷없이 자기를 형님이라 부르는 나무꾼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해와 달이 되는 오누이를 쫓다 썩은 동아줄을 잡고 떨어지는 호랑이는 모두 어느 한 부분이 빠진 것처럼 허술한 모습을 보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호랑이’ 항목을 집필한 원병휘 전 동국대 교수도 “설화에 나오는 호랑이상을 살펴보면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무섭고 두려운 맹수지만 생활에 밀접한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동물로 여겼다”며 “비록 어리석고 의뭉스러울지라도 결코 간교하지 않은, 오히려 우직함이 돋보이는 동물로 인식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로 만나는 호랑이

호랑이의 복합적인 얼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호랑이 나라> 전시와 국립중앙박물관의 <호랑이 그림 I> 전시에서 보듯 여러 종류의 호랑이 민화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산신도’에선 산신들이 주로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다. 호랑이 자체를 산신 또는 산군으로 추켜올려 숭배하는가 하면 도교적 영향을 받은 존재인 산신을 보좌하는 영물로 그리기도 하는 등 호랑이는 복합적인 역할을 한다. “이런 산신도를 모셔놓은 곳은 대개 불교 사찰이라는 점에서 호랑이는 신앙적 측면으로 봐도 우리 문화의 복합성을 드러내는 존재”라고 김 관장은 말했다.

임인년 새해를 맞아 설 연휴를 전후해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호랑이 관련 전시를 저마다의 특색을 고려해 감상하면 호랑이의 다양한 역사적 면모를 찾을 수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랑이 그림을 새긴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호랑이 그림을 비롯해 조상들이 남긴 여러 호랑이 그림과 석상들을 전시하는 울산암각화박물관의
 

<반구대 호(虎)전>이 대표적이다. 울산암각화박물관 관계자는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새긴 호랑이는 마을 주민들이 ‘큰보 호랑이 그림’이라 불렀을 만큼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문양”이라고 설명했다.

강원도 원주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에서 열리는 <역병을 물리치는 동아시아 호랑이 판화전>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티베트, 베트남 등 다른 문화권의 호랑이 목판화를 통해 나라마다 서로 다른 호랑이 모습을 비교할 수 있는 전시다. 다채로운 색깔을 사용한 다른 나라의 호랑이 판화는 각각의 특색이 있지만, 한편으로 호랑이 부적을 만들어 사용했던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현대미술로 재해석한 호랑이 모습을 표현한 <임인년, 어흥! 호랑이 나온다>(갤러리세인), <범 내려온다>(혜화아트센터), <호랑이뎐>(갤러리마리) 등도 둘러볼 만한 전시다. 

[출처] 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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