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자기(自己)와의 만남 / 리사 손(Lisa K. Son), 컬럼비아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나 자신과의 첫 만남은 30대 중반이 되어서였다. 거짓말인 것 같지만, 나는 내 마음의 속임수를 잘 인지하고 있다. 나는 그전에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유년 시절의 리사는 미국 문화에 절대 동화되지 않은 부적응자였음을 기억할 수 있다. 십 대의 리사는 배운 것은 많지만 정작 중요한 할 말은 없는, 긴장하고 주저하는 소녀처럼 보였음을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청소년 시절의 리사가 인생의 수수께끼에 대해 끊임없이 준비하지 않았던 겁쟁이이며 사기꾼처럼 느껴졌다. 30대 중반, 내 딸 세린이가 태어났다. 대부분은 그녀의 아버지와 닮은 점을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세린이를 관찰할 때마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결코 뒤늦은 자각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게는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결국 우리가 메타인지(metacognition) 또는 자기를 반성하는 능력에 대해 알고 있었던 대부분은 인간이 모든 종류의 환상과 편견에 잘 빠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판단 착오를 하고 우리의 선택을 후회하며 우리 자신의 지식에 대해 지나치게 과신한다. 하지만 세린이와 함께한 매 순간은 얼핏 보더라도 나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사후과잉확신편향의 오류’(hindsight bias)*의 중독성 강한 치료제 역할을 한다.

이는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황홀감을 준다. 나는 그녀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생각에 관해 묻고 싶다. 또 한편으로는 단지 그녀의 모든 표현, 몸짓, 변화의 목격자가 되고 싶을 뿐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침묵은 나의 가장 진정한 성찰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사후과잉확신편향의 오류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매혹적인 메타인지적 환상 중 하나이다. 과학 분야에서는 일종의 성인기의 자아중심성(egocentrism)”으로 설명되어왔다. 이는 우리가 너무 현재의 우리는 누구인가에 의해 편향되어 있음을 시사하며 어떠한 우리 자신의 이전 형태들도 마음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30대 중반이 되기 전에 나는 사후과잉확신편향의 오류를 경험했고, 여전히 그렇다. 그런다고 해서 어린 시절 내 모습을 전혀 기억 못 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내가 본 것과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떠올린다. 예컨대 베렌스타인 베어즈(Berenstain Bears) 시리즈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을 기억하는데, Bears Go To School>을 백 번은 읽었을 것이다. 내 침실이 생겨서 흥분했던 것과 다 컸다는 느낌도 기억하고 있다. 어린 시절 내 모습을 회상할 수는 있지만, 사실은 세린이에 비친 나 자신을 보기 전까지는 어린 시절의 나를 찾지는 않았다. 꼬마 세린이가 나의 완벽한 상()을 보여줄 때,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앉아 있다. “엄마, 이번 시리즈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은 이에요.” 잠자리를 준비하면서 세린이의 얼굴을 슬쩍 들여다보면, 문득 어리고 신났던 내 모습으로 돌아간다. 세린이는 나 자신의 거울이다.

또한 나는 학습에 대한 사후과잉확신편향의 오류에 익숙하다. 이제는 전문가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얼마나 자주 노력했는지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여기에서 다시, 나는 물 위에 뜨려고 하지만 풀장 가장자리를 꽉 붙잡고 놓지 않는 세린이를, 배구 연습을 하다가 공을 놓치는 세린이를, 쿠키를 만들다가 밀가루와 설탕을 사방에 쏟는 세린이를 떠올린다. 그런데 이런 순간들 속에서 나 자신을 몇 번이고 만나는데, 이는 어떤 성공이든지 하기 전에 나 자신의 멋진 실패의 모험을 상기시켜주는 것들이다. 나는 세린이를 통해 내가 배우는 데 필요한 것을 몇 번이고 다시 배운다.그리고 이따금 가장 잘 떠오르는 어린 시절 내 모습의 일부는 스스로 자책하고 나쁘게 보이게 하고 단점을 부각하는 것들이다. 일례로 유치원 수업 시간에 다른 아이들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고 내 실수를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혼자 앉아 있으면서 어색해했던 것도. 그런데 여기서 재차 말하지만, 세린이는 나의 치료제이다. 신기하게도 나는 내 유년기의 한 장면에서 서툰 영어로 말하는 것에 긴장하고 있는 그녀를 본다. 그러나 그때, 조금 망설이기는 해도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그녀를 보게 된다. 나는 말동무 없이 우리 학교 식당에서 조용히 앉아있는 세린이를 본다. 그런데 그녀는 사색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세린이는 바로 나다. 나는 긴장감과 두려움을 기억하고 있지만, 세린이는 내 기억의 간극을 메워준다. 그녀는 나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저 기분이 상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기 내어 앞으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세린이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기억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와 일별(一瞥)을 예의주시하며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기회를 소중히 여긴다. 때때로 이러한 성찰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평범한 순간에 나타나기도 하고, 더 유효하고 지속적인 세션이 있을 때도 있다. 특히 세린이의 가르침에 대한 사랑은 나 자신과 꿈들에 대한 거울이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이런 순간들이 쌓여 기억의 공백이 채워지고 나의 편향들은 회복된다. 나 자신과의 이러한 만남은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준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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