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에세이] 예술가는 무엇을 그리는가? -이상원의 싸우는 소/ 이상원, 화가

예술가는 형상(形像)을 만드는 사람이다. 다양한 예술 형식 중 회화는 형상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예술가의 특징을 드러내주는 대표적인 형식이다. 사실화에는 형상의 기본적인 의미인 사물의 생긴 모양이나 상태가 표현된다. 또한 그리는 행위는 마음이나 감각에 의하여 떠오르는 대상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표현함이라는 형상의 동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사실적인 기법의 작품은 감상자가 비교적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예술 형식이기도 하다. 그려진 대상을 실제 외부 대상과 비교하여 동일성과 차이를 구분하는 일은 별다른 훈련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모방된 것에 대해 일종의 쾌감을 느끼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감상자 입장에서 보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된 회화를 감상하는 것은 큰 어려움 없이 예술을 즐겁게 경험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감상자는 예술가의 진짜 의도, 또는 예술작품의 깊이 있는 체험을 놓칠 수도 있다. 작품이 얼마나 대상에 충실했는지를 확인하는 정도에서 감상이 끝나는 경우에 그렇게 된다.

소의 모습을 그린 이상원의 작품 제목은 <>이다. 제목에도 나타나듯이 작품은 싸움판의 소를 그렸다. 일단 소의 형태와 움직임이 잘 표현되었다. 소는 더 이상 인간의 생활공간에서 함께 지내는 동물은 아니지만, 여전히 자연 친화적인 삶에 대한 낭만을 일으키는 대상이기에 그림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상원의 소 작품에는 감상자를 마냥 편안한 상태로 놔두지 않는 다른 요소가 있다. ‘싸움이라는 또 하나의 소재이다.

공격적이고 사나워 보이는 소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평화로운 자연 친화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다. 작품은 그림으로 표현된 장면이기에 마음 놓고 감상할 수 있을 뿐, 실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위해 소싸움이 진행되는 청도에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긴장감과 열기가 가득한 현장의 소를 마음속에 담고 화폭 위에 재구성하였다. 사실적인 이미지 때문에 간과할 수 있지만 작품의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림에서처럼 여러 마리의 소가 떼로 싸움을 벌이는 일도 없고 위협이라도 하듯 단체로 질주하는 일도 일어난 적이 없다. 단지 싸움을 위해 길러진 소의 외형과 소싸움 현장의 감정과 정서를 빌어 화가는 자신의 화폭에 이러저러한 형상을 지어낸 것이다. 그 기량이 워낙 탁월하여 마치 그림에 표현된 현장이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느껴진 것이다.

동양화의 전통에 작품을 통해 성취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여섯 가지 요소가 있다. 회화 작품을 평가하는 동양적인 가치 기준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사혁의 육법이라고 일컫는 이 목록에서 기운생동은 나머지 다섯 가지 요소들을 아우름과 동시에 작품이 추구해야 할 핵심적인 가치로 꼽힌다. 기운생동이란 그림을 통해 작가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이 드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작가의 정신과 같은 생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예컨대 바위를 그린 그림에서 존재의 원초적인 무게와 침묵이 드러날 때이거나 그저 떠도는 하늘의 구름을 그린 그림일 뿐인데 왠지 덧없고 황망한 인생의 진실이 전해진다고 느껴질 때를 말한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바위와 구름에 불과하지만 그림을 통해 작가의 정신성과 그로 말미암은 작품의 생명이 표현된 것이다. 그것은 그림의 표면에 형상화된 것을 뚫고 전달되는 강렬한 느낌이다. 그것은 어떤 감정을 야기할 수도 있다. 전율이나 흥분, 평안, 위로, 확장감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환경의 변화나 감상자의 내적인 상태에 따라 전달되는 느낌의 경중과 해석되는 내용이 달라질 수 있어도 결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상원의 소 그림은 화가가 싸움판의 소에게서 공명했다고 할 수 있는, 아니 더 정확히는 화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밀도 높은 정념(情念)을 싸우는 소를 통해 발견하고 그 형태를 빌어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은 생사의 기로에서 느끼는 소의 두려움과 분노, 살아남기 위한 투지를 화살처럼 쏘아 던지고 있다. 일촉즉발의 사투 현장은 여유가 없다. 얕은 머리를 쓰거나 짐짓 꾸미려고 하는 기색이 전혀 없기에 동물에 불과한 소에게서 어떤 위엄마저 느낄 수 있다. 순수의 세계에서 오는 간절함일 수도 있다. 그것이 자연 본연의 모습이라고 해석하면 작가는 자연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투쟁의 장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이해하면 작가는 그림을 통해 비정한 인간 조건을 표현한 것이다. 예술가는 세상이나 인간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이런 방식으로 형상한다. 만약 예술가가 표현한 형상이 존재의 본질에 닿았다면 그것은 플라톤적 의미의 형상(形相), 즉 에이도스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운생동의 다른 말이기도 할 것이다.

 

. 신혜영(이상원미술관 큐레이터) 

*1935년 춘천 출생. 젊은 시절 상업초상화가로 활동하면서 안중근 의사 공인 영정초상화 제작. 40대 이후 순수미술 작품 발표. 국립러시안뮤지엄(1999), 국립중국미술관(1998), 국립상하이미술관(2001) 등 해외미술관 초대전 외 개인전 및 단체전 다수. 1970년대 후반부터 시간과 공간’ ‘동해인연작 등 대표적인 작품을 제작하며 한국적 사실주의 화가로 활동.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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