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간 그림이 완성되지 않아서 위에 그리고, 또 그리고를 반복하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였지만 이를 위해 더 효율적인 수단을 만들어내고, 나중에는 그것이 목적보다 우선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도 하나의 생명체이자 하나의 우주이다. 생명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의 법칙을 그림에 담아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법칙은 ‘반대의 법칙’이다. <정지의 시작><자유의 법칙><순간의 단면> 등의 시리즈들은 세상의 다양한 역(逆)을 표현한다. 움직임의 역설, 자유의 역설, 시간과 공간의 개념 등, 세상에 존재하는 반대의 법칙들을 표현한다. 이들은 모두 비슷하지만 다르고, 닮아있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는 존재이다. 일반적으로 푸른색은 차가운 색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뜨거운 색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역설이 세상의 기본’이라는 나의 철학적 개념에 가장 부합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무(無)’의 역설

거대한 은하도 멀리서는 하나의 점으로 보인다. 토성의 띠도 가까이에서 보면 어마어마한 두께를 지녔다. 이렇듯 점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이 되며 면은 다시 점이 되기도 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같은 선 위에 존재하고, 또 다른 시각에서는 선 밖에 존재하기도 한다. 멀리서 보면 동일 선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도 다른 각도에서는 그냥 겹쳐져 보일 수도 있다.

결국 모든 것은 기준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기준선을 갖고 있다. 물론 그 안에는 또 다른 많은 기준선들이 있다. 지금 내가 한 말을 완성시켜주는 것은 미래의 나이다. 나는 그림이 주는 가장 원초적인 에너지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위해 가장 근본적인 느낌을 탐구했고, 이를 위해 인간의 탄생과 세상의 시작에 대해 고민해봤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기원은 ‘무(無)’의 역설에서 시작된다. 태초에 아무것도 없는 무의 영역만이 존재했을 때, 이를 위해서는 반대 개념인 ‘유(有)’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역설적인 관계를 깨달았다. 무가 존재하기 위해 유가 존재한다는 논리는 당연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은 관계에 대한 역설, 그 퍼즐을 견디다 못해 세상은 폭발 후 탄생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에너지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온다고 할 수 있고, 동시에 현실 세계인 유와 본질을 같이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그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담고 있다. 이 세상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허상이다. 물질을 그리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무를 그리지만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결과물은 세상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을 반전시켜 유의 영역을 표현한다. 반전의 결과물은 우주 천체의 모습과도 닮아 있는데, 이들의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을 통해 가장 근본적인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유와 무 사이의 간극에서 탄생할 에너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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